인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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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어(人工語, 영어: Constructed Language)는 자연스럽게 말을 쓰다보니 생긴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든 언어를 뜻한다. 옛날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도 인공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가고, 언어의 한 종류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영어 줄말 Conlang을 따라서 그대로 컨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공어의 역사

19세기 : 국제보조어의 전성기

20세기 : 예술어의 전성기

인공어의 종류

인공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억스랭(영어: Auxlang)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보조 인공어, 또는 국제보조어라고 하는 그룹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와 달리 개인의 심미적인 입장에 의해서 생겨난 언어인 아트랭(영어: Artlang)이라고 하는 예술어라는 그룹이다.

세계의 인공어

일본의 인공어

일본의 인공어 그룹은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JEI로 대표되는 에스페란토 그룹.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 인공어를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보조 인공어를 만들어오신 그룹.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그룹들.

대한민국의 인공어

일단 대한민국은 역사까지 파고 들어간 에스페란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인공어의 잎파리 한 줄기는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멀리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석주명 선생님이나(심지어 석주명 선생은 학계 초록에 에스페란토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고등학교 국어나 역사 수업 듣다가 한 번씩 들어보는 KAPF 등 한 세대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이 모두 에스페란토어를 배워보자는 가열찬 움직임에 뛰어들었었다. 심지어 동아일보가 에스페란토 강좌를 신문에 게제해 주는 등[1]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강탈로 인한 조선어, 사상 통제로 인해 에스페란토는 당연히 줄어들게 된다. 해방 이후 건국과 함께 에스페란토 운동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반공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에스페란토는 일정 부분 빨갱이 언어로 자리매김한 데다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사회 분위기가 위축되면서 자연스럽게 에스페란토 운동도 줄어들었다. 다행히 1975년 파란만장한 시절에 (사)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창설되고, 국가 지원 사단법인으로 선정되어 다시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 그 국고 지원이 중단되면서 활성화의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게 된다. 다행히 1994년 한국방문의해와 함께 진행된 세계 에스페란토대회는 성공적이었으나, 그 이후로 대한민국의 에스페란토 운동은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마종태 선생이 에스페란토 학술원 회원으로 있고 이중기 선생이 신임 UEA 이사로 선임되시는 등 에스페란토 계에서 선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2001년 세종대학교의 일련의 언어연구자들이 본격적인 보조 인공어인 우니시를 만들어 발표하여 잠깐 국내 언론에 소개되는 등 꽃을 피웠으나, 보급운동도 없고 보급당할 사람도 없어 역시나 망해버렸다.

반면 대한민국의 아트랭은 대한민국의 판타지 소설의 시초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킨 옹의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은 타자 이영도 선생과 루시엔 전민희 선생이(아, 여기에서 임달영 선생은 제외되지만 그 분은 이후 아트림 미디어로 빠지니 제외) 각자 한 두개씩 인공어를 소설 안에 설정하면서 사람들이 '아, 아트랭이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우후죽순처럼 인공어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부은 게 바로 2001년부터 생긴 반지의 제왕 붐. 이 때부터 아트랭을 만들어보자는 사람들이 인터넷망을 돌아다니던 청소년, 청년 네티즌들 일부에게 퍼졌고, 개별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시점이 되게 되었다.

참고문헌 및 주

  1. 백남규(2006), 에스페란토 강좌, 한국에스페란토협회. 동아일보의 310703-311110일간 100회 연재분의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