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사

Ellif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8일 (금) 17:11 판

에이사-(일본어: エイサー ())는 오키나와아마미군도에서 오봉 때 조상의 위안을 비는 등 제사적 목적으로 생겨난 전통 무용이자, 그 무용을 수행하는 패의 이름이다. 지역에 따라 난사-, 엔사-, 7월무(七月舞 (しちぐゎちもーい) 시치과치모-이[*], 닌부치마-이(念仏廻り (にんぶちまーい)) 등으로도 불린다[1]. 현대에는 소고와 사미센 등의 퍼포먼스를 결합한 오키나와 대표의 전통예능이 되었다. 오키나와 중부를 중심으로 소란보다도 앞서 1950년대에 오키나와 전섬 에이사-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이벤트를 중심으로 재맥락화되었으며[2], 지역 청년회나 대학교 별로 동아리가 조직돼 오키나와와 일본의 청년 등을 묶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3].

유래

에이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봉에 현세로 돌아오는 조상의 영을 환송하기 위해, 남성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주며 돌아다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4].

한편 오키나와 왕국 시절 불교가 전파된 것을 근거로 보는 경우도 있다. 토호쿠 출신의 학승 타이츄-쇼-닌(袋中上人 (たいちゅうしょうにん))이 1603년부터 3년간 슈리에 머물며 정토종을 포교한 것을 계기로, 오키나와 왕가나 귀족을 중심으로 염불이 퍼졌다. 18세기 중반에는, 두타나 전례를 행하는 염불꾼(念仏屋 (にんぶちゃー))을 오봉에 불러 조상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슈리의 거리에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에이사- 형식과 다르게, 염불가 등을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메이지 시기 이후 염불을 마을의 젊은이들이 대신 부르면서 서민들에게 에이사-가 보급되었다. 이후 본섬에서 오키나와 전체로 에이사-가 퍼지면서, 민요에 맞춰 춤추는 경우도 늘어났다. 요나구니 섬에는 1920년경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큰북을 쓰지 않고, 유카타를 입고 머릿수건을 쓰는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이렇게 되면서 1920년대쯤에 염불꾼이 사라지게 됐다[5].

어원

에이사-라는 말은 에이사 노래에서 반주단이 외치는 추임새 중 ‘이야사사 아이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고[6], 진토종 염불의 ‘에이사-, 에이사-, 하야루가에이사-エイサー、エイサー、ヒヤルガエイサ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7].

연행

구본 에이사-

전통적으로 에이사-는 음력 오봉 셋째날인 우-쿠이ウークイ에 이뤄졌으나[8] 최근에는 오봉 첫날인 운케-ウンケー부터 며칠동안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9]. 청년들로 구성된 에이사-집단이 하타가시라를 선두로 마을의 집집을 돌면서 각 집의 조상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에 왕생하도록 주문을 왼 이후에 에이사-를 춘다. 춤이 마치면 각 집이 돈과 술을 집단에게 주고 다음 마을로 향한다. 이를 마치엔사-道エンサー라고 한다[10]. 마을 청년들이 집돌이를 하다 경계에서 여러개의 에이사-패가 서로 마주치면 양쪽이 춤과 소리를 돋워 경쟁한다. 이를 에이사-요이사-エイサーヨイサー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문화검열이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에이사의 내용 또한 검열을 당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타마구스크촌玉城村의 경우, 120개의 가사가 있던 것이, 1937년에 법무국에서 검열을 나와 72-75개 정도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내용은 남여상열지사 등을 이유로 삭제시켰다고 한다[11].

에이사 패의 구성

오키나와의 에이사-는 지역의 부락 단위로 청년을 중심으로 한 패 (청년회)를 구성해서 이뤄지며, 패의 구성원들은 여러 역할로 구분된다[12].

하타가시라(旗頭 (はたがしら), 깃대잡이)
지역이나 단체의 이름이 적힌 3∼4m 높이의 기를 들고, 에이사-의 선두에서 방향을 인도한다[13]. 에이사단끼리 대결할 때는, 자기 무리를 내세우기 위해 더욱 높이 기를 들고, 상대의 기에 부딪히기도 한다.
테-쿠우치テークウチ, 타이코우치たいこうち (太鼓打ち, 큰북잡이)


현대

전후, 에이사-는 오키나와시 등 본섬 중부를 중심으로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다. 1956년 전섬 에이사- 콩쿠르全島エイサーコンクール가 구 코자시(현 오키나와시) 주최로 개최되기 시작하면서, 이후의 에이사- 발전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행사가 경연 이벤트였기 때문에, 심사위원이나 관객의 눈을 끌어야 하는 부분이 강해지게 되면서 참가하는 청년회도 구성이나 대형, 의상, 퍼포먼스적 측면에서 더욱 화려한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또한 노래곡으로 오키나와 민요나 신민요를 채택하게 된다[14] 그러나 경연대회의 평가기준 및 결과를 둘러싸고 각 청년회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1977년부터 경연을 폐지하고 ‘축제’로 형태를 바꾸었다[15].

한편, 나고시 등의 본섬 북부나 중부의 우루마시 등에서는 야케나청년회屋慶名青年会, 헤시키야청년회平敷屋青年会, 아카노청년회赤野青年会 등 100여 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청년회들을 중심으로 손춤을 추는 전통 에이사-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 아카노 청년회가 에이사-를 전국에 소개하면서 1990년대부터는 일본 전역에 오키나와 출신 여부와 관계없이 애호가들이 생겨나 창작 에이사- 단체나 동아리가 설립되었으며, 오키나와 학교 내 체육교육에도 적용되고 있다[16][17]. 또한 2002년에는 오키나와 본토 병합 30주년을 ‘기념’해 ‘일본열도 횡단 에이사- 캐러밴’을 개최하는 등 오키나와 관광 촉진 이벤트의 소재로도 활용되고 있다[18]. 2007년 6월 13일 오키나와시는 〈에이사의 마을 선언〉「エイサーのまち」宣言을 했다. 현재는 미국과 프랑스, 브라질에도 에이사 모임이 있다[19][20].

이벤트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