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의 나라〉(일본어: 信濃の国)는 1900년 향토교육을 목적으로 아사이 키요시에 의해 작사돼 이듬해 현재의 곡으로 발표된 노래로, 현재 나가노현의 현가이다.
역사
현재의 나가노현 권역에 거의 대응되는 시나노국(信濃国 시나노노쿠니[*]는 산맥, 기후, 교통망에 따라 지역이 세분화되었고, 에도시대에도 국이 다수의 번과 막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1871년(명치 4년)의 폐번치현 및 이후의 부현재편에도 주민 다수가 기존 번과 막령에 소속의식을 나타냈기 때문에, 현 전체 구성원의 일체감이 희박하였다. 또한 폐번치현 당시에는 시나노국이 나가노를 현청으로 하는 나가노현과, 마츠모토를 현청으로 하는 치쿠마현(筑摩県 치쿠마켄[*])으로 나뉘어 소속되었었다. 그러나, 1876년에 마츠모토에 위치한 치쿠마현 청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8월 20일, 치쿠마현이 폐현되고 시나노국의 영역이 나가노현으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시나노국 대부분이 나가노현이 되었으나, 이후 ‘남북전쟁’, ‘남북격차’라고 불리는, 나가노시와 마츠모토시와의 격한 지역대립이 계속되어, 현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었다.
〈시나노의 나라〉는 일본제국 시기 유행했던 〈철도창가〉의 영향을 받아, 현내의 지리교육 교재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같은 형태의 지리창가가 다른 현이나 지역에서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현내 각지의 상태를 차별 없이 노래에 담기 위해, 본디 도시명에 불과했던 ‘나가노’보다는 현내의 대부분의 지역이 해당했던 ‘시나노’라는 옛 국명을 살려 지역 전체의 공동체의식 제고를 살린 노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래가 작성된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였기 때문에, 국가주의에 기반한 지역중심적 사고를 고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노래는 처음 1898년(명치 31년) 10월에 시나노교육회가 조직한 소학교창가교수 세목취조위원회의 위원이었던 나가노현 사범학교(현 신슈대학 교육학부) 교유(현 정교사)였던 아사이 키요시가 위원회에게서 의뢰를 받아 작사하고[1] 동료 요다 헨노스케(依田弁之助)가 작곡한 것이었다[2]. 이 곡은 《신슈교육잡지》 1899년 6월호에 게제되었으나 불리지 않았다. 이듬해 1900년, 동 사범학교의 여자 학생이, 요다의 후임 교수인 키타무라 스에하루(北村季晴)에게 10월에 있을 운동회의 유희(집단무용)곡 작곡을 의뢰했다. 이 곡이 〈시나노의 나라〉 가사에 붙여져 1901년 발간된 ‘시나노창가 제1집’에 최초로 발표되었다[3]. 이후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원들이 나가노현 각지의 학교에서 노래를 퍼트려, 나가노현 전체에 널리 전파되었다.
세계대전 이후인 1947년(소화 22년)에는 신헌법 공포를 기념해 《나가노현민가》(키타무라 타카오 작사, 마에다 타카시 작곡)이 공모를 통해 제정되어 현내 각지에서 보급활동이 진행됐으나 현민들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에 이른다.
“나의 아내여” 외친 야마토다케
한숨을 내뱉던 우스이산 뚫린 터널이 스물 여섯개
꿈꾸면서 갈 수 있는 기찻길
한 줄기 길따라서 배워 나가면
옛적 사람보다 떨어질소냐
고래산하보다 뛰어나구나
나라에 위인이 나올 뿐이니
보급 및 활용
〈시나노의 나라〉는 전후부터 나가노현 대다수의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서 다양한 행사 때마다 불려지고 있어서, 소위 “‘신슈 토박이(信州育ち 신슈-소다치[*]’라면 〈시나노의 나라〉를 부를 수 있다”, “회의나 연회가 끝날 때 반드시 〈시나노의 나라〉를 합창한다”, “나가노현내 주민이라도 〈시나노의 나라〉를 부를 수 없다면 타지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신슈인 (나가노현민)에게 깊게 침투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