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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사-'''({{ja-y|エイサー}})는 [[오키나와]]와 [[아마미군도]]에서 [[오봉]] 때 조상의 위안과 함께 제사적 목적으로 생겨난 전통 무용이다. 지역에 따라 난사-, 엔사-, 7월무({{ja-y2|七月舞|しちぐゎちもーい|시치과치모-이}}, 닌부치마-이({{ja-y2|念仏廻り|にんぶちまーい}}) 등으로도 불린다{{Sfn|小林|小林|1997|p=54}}. 현대에는 소고와 [[사미센]] 등의 연주를 결합한 오키나와 대표의 전통예능이 되었다. [[소-란]]보다도 앞서 [[오키나와 전섬 에이사-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이벤트가 이뤄졌으며, 지역 청년회나 대학교 별로 동아리가 조직돼 오키나와와 일본의 청년 등을 묶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Sfn|진필수|2010}}.
'''에이사-'''({{ja-y|エイサー}})는 [[오키나와]]와 [[아마미군도]]에서 [[오봉]] 때 조상의 위안을 비는 등 제사적 목적으로 생겨난 전통 무용이다. 지역에 따라 난사-, 엔사-, 7월무({{ja-y2|七月舞|しちぐゎちもーい|시치과치모-이}}, 닌부치마-이({{ja-y2|念仏廻り|にんぶちまーい}}) 등으로도 불린다{{Sfn|遠藤|2019|p=60}}. 현대에는 소고와 [[사미센]] 등의 연주를 결합한 오키나와 대표의 전통예능이 되었다. [[소-란]]보다도 앞서 [[오키나와 전섬 에이사-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이벤트가 이뤄졌으며, 지역 청년회나 대학교 별로 동아리가 조직돼 오키나와와 일본의 청년 등을 묶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Sfn|진필수|2010}}.


== 유래 ==
== 유래 ==
에이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봉]]에 현세로 돌아오는 조상의 영을 환송하기 위해, 남성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주며 돌아다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Sfn|진필수|2010|p=94}}.  
에이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봉]]에 현세로 돌아오는 조상의 영을 환송하기 위해, 남성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주며 돌아다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Sfn|진필수|2010|p=94}}.  


한편 오키나와 왕국 시절 불교가 전파된 것을 근거로 보는 경우도 있다. 토호쿠 출신의 학승 타이츄-쇼-닌({{ja-y2|袋中上人|たいちゅうしょうにん}})이 1603년부터 3년간 슈리에 머물며 정토종을 포교한 것을 계기로, 오키나와 왕가나 귀족을 중심으로 염불이 퍼졌다. 18세기 중반에는, [[두타]]나 전례를 행하는 염불꾼({{ja-y2|念仏屋|にんぶちゃー}})을 오봉에 불러 조상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슈리의 거리에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에이사- 형식과 다르게, 문부가와 염불가 등을 추었다고 한다. <!--
한편 오키나와 왕국 시절 불교가 전파된 것을 근거로 보는 경우도 있다. 토호쿠 출신의 학승 타이츄-쇼-닌({{ja-y2|袋中上人|たいちゅうしょうにん}})이 1603년부터 3년간 슈리에 머물며 정토종을 포교한 것을 계기로, 오키나와 왕가나 귀족을 중심으로 염불이 퍼졌다. 18세기 중반에는, [[두타]]나 전례를 행하는 염불꾼({{ja-y2|念仏屋|にんぶちゃー}})을 오봉에 불러 조상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슈리의 거리에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에이사- 형식과 다르게, 염불가 등을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東北出身の袋中上人が1603年から3年間首里に滞在して浄土宗を布教したのを契機に、沖縄では王家や貴族の間を中心として念仏が広まった。18世紀中頃には、托鉢や芸事を行う「念仏にゃー」(念仏屋、にんぶちゃー)をお盆に招いて先祖の供養を行う風習が、首里の屋敷町などで存在していたという[2]。当時は現代のエイサーと形式が異なり、門付歌と念仏歌だけで踊っていた。


明治以降になると、念仏の詠唱を村の若人が代行する形で庶民の間にエイサーが普及していった。沖縄本島中北部から県内全域へ伝播して大衆化する中で、民謡などを取り込む例も増えた。与那国島で始まったのは80年ほど前と言われている。なお、戦前は太鼓を使う例は少なく、浴衣などの普段着姿で手ぬぐいを頭に巻くというスタイルが主流であった[3]。念仏にゃーの存在は大正の終わりごろにはほぼ消滅している[4]
메이지 시기 이후 염불을 마을의 젊은이들이 대신 부르면서 서민들에게 에이사-가 보급되었다. 이후 본섬에서 오키나와 전체로 에이사-가 퍼지면서, 민요에 맞춰 춤추는 경우도 늘어났다. [[요나구니 섬]]에는 1920년경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큰북을 쓰지 않고, 유카타를 입고 머릿수건을 쓰는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이렇게 되면서 1920년대쯤에 염불꾼이 사라지게 됐다{{Sfn|小林|小林|1997|p=54}}.


戦後、エイサーは沖縄市など本島中部を中心に大きくスタイルを変えた。旧コザ市(現在の沖縄市)主催で1956年に全島エイサーコンクールを開催。この沖縄随一のエイサーイベントは後のエイサーの発展に多大なる影響を与えた。当初コンクール(順位を競う)であったため、審査員や観客に魅せる(見せる)という部分に重きが置かれ、出場する青年会は構成や隊形、衣装、パフォーマンスなどをより派手なスタイルに変化させていくことになる。これらのエイサー文化と共に歩んできた沖縄市は2007年6月13日に「エイサーのまち」宣言をし[5]、地域の活性化に取り組んでいる。一方で、名護市以北の本島北部では手踊りの伝統エイサーも続けられている。また、沖縄本島中部のうるま市の伝統エイサーも歴史は古く、屋慶名青年会、平敷屋青年会、赤野青年会などは100年余りの伝統がある。屋慶名エイサーの起源は明治24年(1890年)旧暦7月とされ、1991年には生誕100年祭が行われた。また、赤野青年会が初めて本土にエイサーを紹介したとされており、全国的には1990年代以降に沖縄県出身者が中心となって多くのエイサー団体が設立された[6]。また、県出身者以外の愛好者の加入や独自団体の設立も増えていると言われる。国外で踊られた例として、アメリカ合衆国やフランスなどがある[7]。-->
== 연행 ==
=== 전통 방식 ===
 
 
===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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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エイサーは沖縄市など本島中部を中心に大きくスタイルを変えた。旧コザ市(現在の沖縄市)主催で1956年に全島エイサーコンクールを開催。この沖縄随一のエイサーイベントは後のエイサーの発展に多大なる影響を与えた。当初コンクール(順位を競う)であったため、審査員や観客に魅せる(見せる)という部分に重きが置かれ、出場する青年会は構成や隊形、衣装、パフォーマンスなどをより派手なスタイルに変化させていくことになる。これらのエイサー文化と共に歩んできた沖縄市は2007年6月13日に「エイサーのまち」宣言をし[5]、地域の活性化に取り組んでいる。一方で、名護市以北の本島北部では手踊りの伝統エイサーも続けられている。また、沖縄本島中部のうるま市の伝統エイサーも歴史は古く、屋慶名青年会、平敷屋青年会、赤野青年会などは100年余りの伝統がある。屋慶名エイサーの起源は明治24年(1890年)旧暦7月とされ、1991年には生誕100年祭が行われた。また、赤野青年会が初めて本土にエイサーを紹介したとされており、全国的には1990年代以降に沖縄県出身者が中心となって多くのエイサー団体が設立された[6]。また、県出身者以外の愛好者の加入や独自団体の設立も増えていると言われる。国外で踊られた例として、アメリカ合衆国やフランスなどがある[7]。
 
에이서는 음력 추석날 밤(우퀴이)에 행해진다.최근에는 추석 맞이(웡케)부터 며칠 연속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깃대장을 선두로 한 일행은 지역의 집집마다 돌며 각 집의 승려의 영혼이 무사히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말을 하고, 에이서를 추는 춤을 춘다.춤이 끝나면 일행은 술과 돈을 받고 다음 집으로 가서 기도와 춤을 반복한다.이렇게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것을 도엔서(道苑士)라고 한다. 에이서는 마을회 단위로 결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계에서 여러 개의 에이서가 서로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이때는 양측이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춤에 열을 올린다.이를 에이서요이서 또는 에이서난서, 에이서오라세, 에이서거예 등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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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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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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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7일 (목) 00:31 판

에이사-(일본어: エイサー ())는 오키나와아마미군도에서 오봉 때 조상의 위안을 비는 등 제사적 목적으로 생겨난 전통 무용이다. 지역에 따라 난사-, 엔사-, 7월무(七月舞 (しちぐゎちもーい) 시치과치모-이[*], 닌부치마-이(念仏廻り (にんぶちまーい)) 등으로도 불린다[1]. 현대에는 소고와 사미센 등의 연주를 결합한 오키나와 대표의 전통예능이 되었다. 소-란보다도 앞서 오키나와 전섬 에이사-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이벤트가 이뤄졌으며, 지역 청년회나 대학교 별로 동아리가 조직돼 오키나와와 일본의 청년 등을 묶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2].

유래

에이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봉에 현세로 돌아오는 조상의 영을 환송하기 위해, 남성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주며 돌아다니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많다[3].

한편 오키나와 왕국 시절 불교가 전파된 것을 근거로 보는 경우도 있다. 토호쿠 출신의 학승 타이츄-쇼-닌(袋中上人 (たいちゅうしょうにん))이 1603년부터 3년간 슈리에 머물며 정토종을 포교한 것을 계기로, 오키나와 왕가나 귀족을 중심으로 염불이 퍼졌다. 18세기 중반에는, 두타나 전례를 행하는 염불꾼(念仏屋 (にんぶちゃー))을 오봉에 불러 조상에게 공양하는 풍습이, 슈리의 거리에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에이사- 형식과 다르게, 염불가 등을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메이지 시기 이후 염불을 마을의 젊은이들이 대신 부르면서 서민들에게 에이사-가 보급되었다. 이후 본섬에서 오키나와 전체로 에이사-가 퍼지면서, 민요에 맞춰 춤추는 경우도 늘어났다. 요나구니 섬에는 1920년경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큰북을 쓰지 않고, 유카타를 입고 머릿수건을 쓰는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이렇게 되면서 1920년대쯤에 염불꾼이 사라지게 됐다[4].

연행

전통 방식

현대

참고문헌

  • 진필수 (2010년 1월). 오키나와(沖縄)의 전통예능 활성화와 소수민족 정체성의 행방: 에이사(エイサ—)의 사례. 《한국문화인류》 43 (1): 89~128.
  • (일본어) 遠藤美奈 (2019년 3월 31일). 戦前の沖縄における「エイサー」と 「盆踊り」の諸相-. 《沖縄芸術の科学》 (沖縄県立芸術大学附属研究所) 31: 59-75.
  • (일본어) 小林公江, 小林幸男 (1997년). 今帰仁エイサー-今泊・兼次・崎山の資料化を通して-. 《沖縄芸術の科学》 (沖縄県立芸術大学) 9: 71-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