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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는 원래부터 다양한 철도가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오키나와섬은 폭격을 크게 맞아 철도 사용이 모두 중단되었다. 특히 철도시설은 주요 공습대상이었던 데에다가, 지상전 시기에도 파괴되었던 만큼 오키나와의 철도시설은 완전 제거됐다. [[8·15 일본 패망|해방]]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령으로 남아 1972년까지 미군정 하에 있었고, 이 기간 오키나와는 시가지와 도로교통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어 운영되어, 철도를 깔 새가 없었다. 과거의 나하역은 현재의 나하시내버스터미널이 되었으니 말 다했지, 뭐.
오키나와에는 원래부터 다양한 철도가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오키나와섬은 폭격을 크게 맞아 철도 사용이 모두 중단되었다. 특히 철도시설은 주요 공습대상이었던 데에다가, 지상전 시기에도 파괴되었던 만큼 오키나와의 철도시설은 완전 제거됐다. [[8·15 일본 패망|해방]]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령으로 남아 1972년까지 미군정 하에 있었고, 이 기간 오키나와는 시가지와 도로교통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어 운영되어, 철도를 깔 새가 없었다. 과거의 나하역은 현재의 나하시내버스터미널이 되었으니 말 다했지, 뭐.


1972년 오키나와 반환({{del|수복이 아니다! 반환!}}) 이후 일본국은 '신 전국 종합개발계획'을 개정, '오키나와진흥계발계획'을 제정했다. 이 때부터 현 유이레일의 검토에 들어가, 과좌식 모노레일과 함께 현재의 노선 계획을 거의 확정했다. 하지만 80년대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1972년 오키나와 반환({{del|수복이 아니다! 반환!}}) 이후 일본국은 '신 전국 종합개발계획'을 개정, '오키나와진흥계발계획'을 제정했다. 이 때부터 현 유이레일의 검토에 들어가, 과좌식 모노레일과 함께 현재의 노선 계획을 거의 확정했다. 77년에는 노선 중 가장 난과제가 되었던 쿠모지강 경유/국제거리 경유 노선 부분을 채산성(BC 수치)을 높이기 위해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한다 {{del[[블랑카의 뭡니까 이게|경제성 나빠요 사람이 불편해요]]}}<ref name="yuirs">{{언어고리|ja}}[http://yui-rail.co.jp/about/introduction.html]</ref>. 드디어 81년에는 국고보조사업에 선정되고, 82년에는 당시 [[일본 국철 민영화|국철 민영화]]와 제3섹터 붐의 여파로 제3섹터 [[오키나와도시모노레일]]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버스회사들의 항의로 93년에야 겨우 MOU를 체결하고, 1995년에야 궤도 특허신청서를 제출해 96년([[평성]] 8년) 3월 22일에야 정부예산을 받아 동년 10월에야 1차 공사에 들어갔다(...) {{del|[[수인선]] 뺨치는 느린 공사속도}} 이후 11월 26일에는 2차공사, [[1997년|이듬해]] 4월 10일에는 3차 공사의 시행에 들어가 98년 8월 27일에야 첫 궤도 거더를 가설하고, 1999년에는 운영기지 건설에 들어갔다<ref name="yuirs" />. 2001년부터 시운전을 시작, 마지막으로 2002년 11월에는 전선 시운전에 들어가고, 2003년 3월 15일에 학습운전에 들어가 2003년 8월 10일에야 개통하는 참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개업할 수 있었다.


== 주 및 참고문헌 ==
== 주 및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