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두 판 사이의 차이

851 바이트 추가됨 ,  2014년 2월 16일 (일)
61번째 줄: 61번째 줄:
[[개신교]]와 가톨릭이 상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개항과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쪽으로 먼저 들어왔기 때문.  
[[개신교]]와 가톨릭이 상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개항과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쪽으로 먼저 들어왔기 때문.  


이러한 현상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특히 인천의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불교나 유교, 민속신앙을 가진 마을 전통이 인천 본토를 기준으로 [[옥골]] 같은 극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통용되지 않게 되었고, 이 기반 위에서 기독교 선교가 다른 곳보다 먼저 들어올 수 있었고, 그 강도도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1909년 개신교 선교분할|1909년의 선교분할]] 결과 인천지역은 대체로 감리교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특히 인천의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불교나 유교, 민속신앙을 가진 마을 전통이 인천 본토를 기준으로 [[옥골]] 등의 극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통용되지 않게 되었고, 이 기반 위에서 기독교 선교가 다른 곳보다 먼저 들어올 수 있었고, 그 강도도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조선시대 인천도호부는 산골인 문학동에 위치해 있었던 반면, 이후 도시 설립은 인천항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인천항 지역에는 유교나 불교 문화권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로 최근 30-40년동안 인천광역시의 매립과 함께 새로운 인구들이 인천시로 이주하고, 또한 도심도 현재 인천시청이 있는 간석/구월동 지역쪽 방향으로 점차 이동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인구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1960-70년대 부흥과 함께 개신교인 증가가 이루어지면서 개신교화가 심화되었다.


따라서 인천 개신교는 인천을 '''[[복음의 관문]]'''이라고 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한국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지고 [[기념탑교회|그걸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등]] 개신교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인천기독교신문]]과 [[연합기독뉴스]]라는 지역 대상 개신교 신문이 두개나 있는데다, 이들이 지역의 새누리당 강세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으며, 심지어 시장 선거 당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교라도 개신교 교회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ref>심지어 송영길 시장은 무교였지만 [[인천기독교연합회|인기연]]이 환영회 열어주고 이것저것 압력 넣고 하니까 개신교에 긍정적인 발언을 하고 그러는 수준이다.</ref> 개신교가 인천광역시 시민들의 삶에 있어서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천 개신교는 인천을 '''[[복음의 관문]]'''이라고 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한국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지고 [[기념탑교회|그걸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등]] 개신교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인천기독교신문]]과 [[연합기독뉴스]]라는 지역 대상 개신교 신문이 두개나 있는데다, 이들이 지역의 새누리당 강세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으며, 심지어 시장 선거 당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교라도 개신교 교회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ref>심지어 송영길 시장은 무교였지만 [[인천기독교연합회|인기연]]이 환영회 열어주고 이것저것 압력 넣고 하니까 개신교에 긍정적인 발언을 하고 그러는 수준이다.</ref> 개신교가 인천광역시 시민들의 삶에 있어서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1909년 개신교 선교분할|1909년의 선교분할]] 결과 인천지역은 대체로 감리교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다시 장로교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목회자들의 자유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분포가 균일한 상태이다.


인천 가톨릭도 세력이 대단한 게, 수도권 지역의 분구 과정 중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인천교구]]가 [[천주교 수원교구|수원교구]]보다 1년 먼저, 대한민국 로마가톨릭의 3관구 체제 성립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에서 분구가 되었다(1962). 물론 적임자 주교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지만, 목구 체제에서 교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곧바로 분구가 된 것도 인천 가톨릭 교세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인천 가톨릭도 세력이 대단한 게, 수도권 지역의 분구 과정 중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인천교구]]가 [[천주교 수원교구|수원교구]]보다 1년 먼저, 대한민국 로마가톨릭의 3관구 체제 성립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에서 분구가 되었다(1962). 물론 적임자 주교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지만, 목구 체제에서 교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곧바로 분구가 된 것도 인천 가톨릭 교세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71번째 줄: 73번째 줄:
이런 이유로 인천 본토는 거의 기독교인이 아니면 무교고, 가끔씩 불교인, 유교인을 만나는 수준이며, 심지어 조계종의 한 연구소는 남인천과 북인천을 '포교가 취약한 지역'으로 인정할 지경이다<ref>{{기사 인용|url=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847|출판사=불교포커스|저자=신혁진 기자|제목=경기택지개발 종교용지 온통 개신교‥불교는 ‘제로’|작성일자=2011-08-30|확인일자=2012-03-03}}</ref>. 심지어 개신교 쪽에서 이슬람교를 막아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써가면서 노력할 정도니 앞으로도 현재의 종교 지형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천 본토는 거의 기독교인이 아니면 무교고, 가끔씩 불교인, 유교인을 만나는 수준이며, 심지어 조계종의 한 연구소는 남인천과 북인천을 '포교가 취약한 지역'으로 인정할 지경이다<ref>{{기사 인용|url=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847|출판사=불교포커스|저자=신혁진 기자|제목=경기택지개발 종교용지 온통 개신교‥불교는 ‘제로’|작성일자=2011-08-30|확인일자=2012-03-03}}</ref>. 심지어 개신교 쪽에서 이슬람교를 막아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써가면서 노력할 정도니 앞으로도 현재의 종교 지형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인천지역의 개신교가 상당히 우파적인 만큼 다음세대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무교인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관계로 향후 20-30년 이후 인천 시민의 종교현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인천지역의 개신교가 상당히 우파적인 만큼 다음세대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무교인이나 가톨릭인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관계로 향후 20-30년 이후 인천 시민의 종교현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 정치 ==
== 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