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7,239
번
(→심리적 구분) |
잔글 (문자열 찾아 바꾸기 - "|출판사=" 문자열을 "|뉴스=" 문자열로) |
||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 |||
61번째 줄: | 61번째 줄: | ||
[[개신교]]와 가톨릭이 상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개항과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쪽으로 먼저 들어왔기 때문. | [[개신교]]와 가톨릭이 상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개항과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쪽으로 먼저 들어왔기 때문. | ||
이러한 현상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특히 인천의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불교나 유교, 민속신앙을 가진 마을 전통이 인천 본토를 기준으로 [[옥골]] | 이러한 현상은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특히 인천의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기존 불교나 유교, 민속신앙을 가진 마을 전통이 인천 본토를 기준으로 [[옥골]] 등의 극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통용되지 않게 되었고, 이 기반 위에서 기독교 선교가 다른 곳보다 먼저 들어올 수 있었고, 그 강도도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조선시대 인천도호부는 산골인 문학동에 위치해 있었던 반면, 이후 도시 설립은 인천항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인천항 지역에는 유교나 불교 문화권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둘째로 최근 30-40년동안 인천광역시의 매립과 함께 새로운 인구들이 인천시로 이주하고, 또한 도심도 현재 인천시청이 있는 간석/구월동 지역쪽 방향으로 점차 이동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인구 구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1960-70년대 부흥과 함께 개신교인 증가가 이루어지면서 개신교화가 심화되었다. | ||
따라서 인천 개신교는 인천을 '''[[복음의 관문]]'''이라고 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한국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지고 [[기념탑교회|그걸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등]] 개신교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인천기독교신문]]과 [[연합기독뉴스]]라는 지역 대상 개신교 신문이 두개나 있는데다, 시장 선거 당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교라도 개신교 교회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개신교가 인천광역시 시민들의 삶에 있어서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인천 개신교는 인천을 '''[[복음의 관문]]'''이라고 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한국100주년기념탑]]이 세워지고 [[기념탑교회|그걸 기념하는 교회가 세워지는 등]] 개신교인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특히 [[인천기독교신문]]과 [[연합기독뉴스]]라는 지역 대상 개신교 신문이 두개나 있는데다, 이들이 지역의 새누리당 강세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으며, 심지어 시장 선거 당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무교라도 개신교 교회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ref>심지어 송영길 시장은 무교였지만 [[인천기독교연합회|인기연]]이 환영회 열어주고 이것저것 압력 넣고 하니까 개신교에 긍정적인 발언을 하고 그러는 수준이다.</ref> 개신교가 인천광역시 시민들의 삶에 있어서 끼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 ||
[[1909년 개신교 선교분할|1909년의 선교분할]] 결과 인천지역은 대체로 감리교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다시 장로교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목회자들의 자유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현재는 감리교와 장로교의 분포가 균일한 상태이다. | |||
인천 가톨릭도 세력이 대단한 게, 수도권 지역의 분구 과정 중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인천교구]]가 [[천주교 수원교구|수원교구]]보다 1년 먼저, 대한민국 로마가톨릭의 3관구 체제 성립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에서 분구가 되었다(1962). 물론 적임자 주교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지만, 목구 체제에서 교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곧바로 분구가 된 것도 인천 가톨릭 교세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 인천 가톨릭도 세력이 대단한 게, 수도권 지역의 분구 과정 중에서 [[천주교 인천교구|인천교구]]가 [[천주교 수원교구|수원교구]]보다 1년 먼저, 대한민국 로마가톨릭의 3관구 체제 성립과 동시에 서울대교구에서 분구가 되었다(1962). 물론 적임자 주교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가 되지만, 목구 체제에서 교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곧바로 분구가 된 것도 인천 가톨릭 교세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 ||
특히 기독교 강세 지역이라는 것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점이, 대한민국에서 반경 500m 이내에 기독교 4대 종단([[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예배처]]가 한 곳에 있는 곳은 [[간석동]]이 유일하다.<ref>서울에도 있을법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작 정교회 서울대성당은 아현동에 있고, 그 동네에는 성공회 교회가 없다. 반면 여기는 가장 먼 가톨릭 간석4동본당(신학교도 딸려 있다!)과 성공회 간석교회의 본당간 직선거리가 900m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인천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교회도 있으며, 구 경인선 부지 + 인천메트로 인입선 입구로 대표되는 [[인천 중앙공원|중앙공원]] 최북단에 [[중부연회|기감 중부연회]]가 웨슬리 희망동산이라는 공원을 세워두었다.</ref> | 특히 기독교 강세 지역이라는 것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점이, 대한민국에서 반경 500m 이내에 기독교 4대 종단([[개신교]],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예배처]]가 한 곳에 있는 곳은 [[간석동]]이 유일하다.<ref>서울에도 있을법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작 정교회 서울대성당은 아현동에 있고, 그 동네에는 성공회 교회가 없다. 반면 여기는 가장 먼 가톨릭 간석4동본당(신학교도 딸려 있다!)과 성공회 간석교회의 본당간 직선거리가 900m도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인천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교회도 있으며, 구 경인선 부지 + 인천메트로 인입선 입구로 대표되는 [[인천 중앙공원|중앙공원]] 최북단에 [[중부연회|기감 중부연회]]가 웨슬리 희망동산이라는 공원을 세워두었다.</ref> | ||
이런 이유로 인천 본토는 거의 기독교인이 아니면 무교고, 가끔씩 불교인, 유교인을 만나는 수준이며, 심지어 조계종의 한 연구소는 남인천과 북인천을 '포교가 취약한 지역'으로 인정할 지경이다<ref>{{기사 인용|url=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847|뉴스=불교포커스|저자=신혁진 기자|제목=경기택지개발 종교용지 온통 개신교‥불교는 ‘제로’|작성일자=2011-08-30|확인일자=2012-03-03}}</ref>. 심지어 개신교 쪽에서 이슬람교를 막아내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써가면서 노력할 정도니 앞으로도 현재의 종교 지형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 |||
다만 인천지역의 개신교가 상당히 우파적인 만큼 다음세대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무교인이나 가톨릭인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관계로 향후 20-30년 이후 인천 시민의 종교현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하다. | |||
== 정치 == | == 정치 == | ||
78번째 줄: | 84번째 줄: | ||
인천광역시는 대한민국 [[철도]]의 첫 시점이었던 [[경인선]]이 1899년 처음으로 개통된 지역이다. 그러나 경부선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원래 인천부터 노량진, 그리고 서울역을 잇는 하나의 본선으로 여겨졌던 경인선은 서울역-구로 구간을 경부선에 빼앗기고 구로에서 분기되는 지선으로 전락되었다. 이후 경인선은 [[1974년]] [[8월 15일]] 복선 전철화가 이루어진 이래, [[1991년]] [[1월]]([[부평역|부평]]-[[용산역|용산]] 구간)부터 [[2005년]] [[12월]]([[동인천역|동인천]]-[[주안|주안역]] 구간)까지 복복선화가 진행되었지만, 경인선 이외 인천과 서울간을 잇는 철도는 2007년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개통되고, 이후 서울역 연장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전무하였다. 그나마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개통되면서 청라권, 북인천권의 서울간 교통은 매우 개선되었으나, 아직까지 경인선을 제외하고 본토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없는 실정이다. {{del|인천에 누군가가 [[사철]]을 뚫어준다면 본격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분위기}} 하지만 [[2013년]] [[서울지하철 7호선|7호선]] 연장이 [[부평구청역]]까지 이어졌고, 이후 [[인천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이후 [[석남역]]까지 연장될 예정이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인천광역시는 대한민국 [[철도]]의 첫 시점이었던 [[경인선]]이 1899년 처음으로 개통된 지역이다. 그러나 경부선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원래 인천부터 노량진, 그리고 서울역을 잇는 하나의 본선으로 여겨졌던 경인선은 서울역-구로 구간을 경부선에 빼앗기고 구로에서 분기되는 지선으로 전락되었다. 이후 경인선은 [[1974년]] [[8월 15일]] 복선 전철화가 이루어진 이래, [[1991년]] [[1월]]([[부평역|부평]]-[[용산역|용산]] 구간)부터 [[2005년]] [[12월]]([[동인천역|동인천]]-[[주안|주안역]] 구간)까지 복복선화가 진행되었지만, 경인선 이외 인천과 서울간을 잇는 철도는 2007년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개통되고, 이후 서울역 연장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전무하였다. 그나마 인천국제공항철도가 개통되면서 청라권, 북인천권의 서울간 교통은 매우 개선되었으나, 아직까지 경인선을 제외하고 본토 인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가 없는 실정이다. {{del|인천에 누군가가 [[사철]]을 뚫어준다면 본격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분위기}} 하지만 [[2013년]] [[서울지하철 7호선|7호선]] 연장이 [[부평구청역]]까지 이어졌고, 이후 [[인천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이후 [[석남역]]까지 연장될 예정이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 ||
한편 1995년을 기해 폐지된 [[수인선]]은 [[2012년]] 우선 [[송도역|송도]]-[[오이도역|오이도]]역 구간이 개통되며 재운용에 들어갔고, 이후 [[인천역]]까지 | 한편 1995년을 기해 폐지된 [[수인선]]은 [[2012년]] 우선 [[송도역|송도]]-[[오이도역|오이도]]역 구간이 개통되며 재운용에 들어갔고, 이후 [[인천역]]까지 연장되었다. 또한 2016년 8월에는 '''[[인천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는데, 좋은 전철인지 안 좋은 전철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철도가 되었다. | ||
=== 도로 === | === 도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