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탕거 요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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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부탕거 요새'''({{llang|nl|Vesting Bourtange}})는 침묵공 빌럼의 지시에 의해 별모양으로 만들어져 1593년 완공된, 네덜란드 그로닝언주 부탕거 마을에 있는 요새다. 요새의 목적은 80년 전쟁 당시 스페인이 다스리고 있던 그로닝언시와 독일을 잇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672년에 있었던 전투 이후, 요새는 1851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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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탕거 요새'''({{llang|nl|Vesting Bourtange}})는 [[오라녜의 빌럼 1세|침묵공 빌럼]]의 지시에 의해 별모양으로 만들어져 [[1593년]] 완공된, [[네덜란드]] [[그로닝언주]] [[부탕거]] 마을에 있는 요새다. 요새의 목적은 [[80년 전쟁]] 당시 스페인이 다스리고 있던 [[그로닝언시]]와 독일을 잇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탕거 요새'''({{llang|nl|Vesting Bourtange}})는 [[오라녜의 빌럼 1세|침묵공 빌럼]]의 지시에 의해 별모양으로 만들어져 [[1593년]] 완공된, [[네덜란드]] [[그로닝언주]] [[부탕거]] 마을에 있는 프랙털 형태의{{sfn|Çelİk|2016|p=197}}, 운하를 활용한 요새다. 요새의 목적은 [[80년 전쟁]] 당시 스페인이 다스리고 있던 [[그로닝언시]]와 독일을 잇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672년에 있었던 전투 이후, 요새는 1851년까지 네덜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 방어망으로 활용되었으나 1851년 기지가 철수되면서 마을로 변했다. 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1672년에 있었던 전투 이후, 요새는 1850년까지 네덜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 방어망으로 활용되었으나 1851년 군기지 기능이 폐지되며 마을로 변했다. 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 역사 ==
== 역사 ==
<!-- At the start of the Eighty Years' War (1568–1648), the Spaniards had control over Groningen and the passage to Germany through a marshy area. William, the instigator of the Dutch Revolt, deemed it necessary to seize control of the link between Groningen and Germany. He decided to have a fortification built in the Bourtange passage. A fort was completed in 1593, with a network of canals and lakes which were used as moats. Soon after its construction, Spanish forces from Groningen besieged it, though the attack ended in failure.[1]
80년 전쟁(1568–1648)이 시작됐을 때, 그로닝언 지역과 독일 방향 가도는 스페인이 점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봉기를 일으킨 윌리엄은 그로닝언과 독일 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부탕거 통로에 요새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수로와 늪을 해자로 전환하고, 요새로 오각형 형태로 디자인된 요새는 [[1593년]] 완공됐다. 완공 직후 스페인 군대가 요새를 포위했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Fort Bourtange faced another siege in 1672 against invading forces of Christoph Bernhard von Galen the Prince-Bishop of Münster, France's German ally in the Franco-Dutch War. After capturing 28 cities and towns in the northern Netherlands, they demanded that the fort be surrendered. The fort's governor, Captain Protts, refused, and the Münsters replied with a frontal assault. Thanks to the surrounding marshes and the time-tested fortifications, the invading army was repelled successfully.[2]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뮌스터 왕자주교인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의 군대가 또다시 요새를 포위했다. 군대는 네덜란드 북부 28개의 도시와 마을을 사로잡고 요새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요새장인 프로츠{{small|Protts}} 대위는 이를 거부했다. 뮌스터 군대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배후습지와 시간이 입증한 요새화로 인해, 침략군은 격퇴되었다.  


After its conversion into a village in 1851, living conditions began to deteriorate. Over 100 years later in 1960, the local government decided to stop the decline by restoring the old fort to its 1740–50 appearance and converting into a historical museum. -->
1851년 요새가 마을이 된 이후, 기존의 군 시설 모두가 주민들의 환경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습지는 성벽 둔덕에서 나온 덮여지고, 요새 건물은 철거되었다{{Sfn|Ashworth|Bruce|2009|p=308}}. 1960년, 지방정부는 옛 요새를 1740-50년대 모습으로 복원하고 마을을 역사 박물관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 사진 ==
== 사진 ==


== 주와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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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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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 {{저널 인용|언어고리=en|이름=Gregory|성=Ashworth|이름2=David M.|성2=Bruce|연도=2009) Town walls, walled towns and tourism: paradoxes and paradigms|저널=Journal of Heritage Tourism|권=4|호=4|쪽=299-313|doi=10.1080/17438730903118097|ref=CITEREFAshworthBruce2009}}
* {{책 인용|언어고리=en|제목=Environmental Sustainability and Landscape Management|장=Landscape Design Approaches Based on Fractal Geometry|성=Filiz Çelİk|이름=Filiz|쪽=188-204|url=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11065048_Environmental_Sustainability_and_Landscape_Management|편집자=Recep Efe, İsa Cürebal, Abdalla Gad, Brigitta Tóth|ISBN=978-954-07-4140-6|출판사=St. Kliment Ohridski University Press|ref=CITEREFÇelİk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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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3일 (수) 02:31 판

부탕거 요새(네덜란드어: Vesting Bourtange)는 침묵공 빌럼의 지시에 의해 별모양으로 만들어져 1593년 완공된, 네덜란드 그로닝언주 부탕거 마을에 있는 프랙털 형태의[1], 운하를 활용한 요새다. 요새의 목적은 80년 전쟁 당시 스페인이 다스리고 있던 그로닝언시와 독일을 잇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672년에 있었던 전투 이후, 요새는 1850년까지 네덜란드와 독일 간의 국경 방어망으로 활용되었으나 1851년 군기지 기능이 폐지되며 마을로 변했다. 현재는 역사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역사

80년 전쟁(1568–1648)이 시작됐을 때, 그로닝언 지역과 독일 방향 가도는 스페인이 점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봉기를 일으킨 윌리엄은 그로닝언과 독일 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부탕거 통로에 요새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수로와 늪을 해자로 전환하고, 요새로 오각형 형태로 디자인된 요새는 1593년 완공됐다. 완공 직후 스페인 군대가 요새를 포위했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뮌스터 왕자주교인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의 군대가 또다시 요새를 포위했다. 군대는 네덜란드 북부 28개의 도시와 마을을 사로잡고 요새의 항복을 요구했으나, 요새장인 프로츠Protts 대위는 이를 거부했다. 뮌스터 군대는 전면 공격에 나섰으나, 배후습지와 시간이 입증한 요새화로 인해, 침략군은 격퇴되었다.

1851년 요새가 마을이 된 이후, 기존의 군 시설 모두가 주민들의 환경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습지는 성벽 둔덕에서 나온 덮여지고, 요새 건물은 철거되었다[2]. 1960년, 지방정부는 옛 요새를 1740-50년대 모습으로 복원하고 마을을 역사 박물관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사진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