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가브리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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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llang|it|Maria Gabriella Sagheddu}}, [[1914년]] [[3월 17일]] ~ [[1939년]])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소속된 이탈리아인 [[수녀]] 였으며, 25살의 나이에 그로타페라타 수녀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1983년]] [[교회일치운동|교회일치]]에 대해 일생동안 베푼 영적 공헌을 인정받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가톨릭 일치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됐다. | '''마리아 가브리엘라 사게두'''({{llang|it|Maria Gabriella Sagheddu}}, [[1914년]] [[3월 17일]] ~ [[1939년]])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소속된 이탈리아인 [[수녀]] 였으며, 25살의 나이에 그로타페라타 수녀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1983년]] [[교회일치운동|교회일치]]에 대해 일생동안 베푼 영적 공헌을 인정받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가톨릭 일치 운동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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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의 여동생이 죽고 나서, 깊은 연민을 느낀 그녀는 18살이 되는 해에 [[아지오네 카톨리카]]에 가입했다<ref name=weddell/>. 그녀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어르신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기도 생활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녀는 가톨릭 교리서를 손에 지도봉을 들고 가르쳤지만, 어느날 지역 사제가 그의 손에서 지도봉을 빼앗고, "지도봉이 아니라 인내로 무장하십시오"라는 쪽지를 손에 쥐어주자, 마리아는 그 비판을 받아들이고 지도방식을 변화시켰다. | 이후 그의 여동생이 죽고 나서, 깊은 연민을 느낀 그녀는 18살이 되는 해에 [[아지오네 카톨리카]]에 가입했다<ref name=weddell/>. 그녀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어르신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기도 생활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녀는 가톨릭 교리서를 손에 지도봉을 들고 가르쳤지만, 어느날 지역 사제가 그의 손에서 지도봉을 빼앗고, "지도봉이 아니라 인내로 무장하십시오"라는 쪽지를 손에 쥐어주자, 마리아는 그 비판을 받아들이고 지도방식을 변화시켰다. | ||
20세에, 사게두는 [[이탈리아]] | 20세에, 사게두는 [[이탈리아]] [[로마]] 근교에 있는 [[그로타페라타]](Grottaferrata)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고<ref name=vitorchiano/> '마리아 가브리엘라'라는 수녀명을 받았다. 이 당시 수도원의 [[아뻬스]]는 마리아 피아 굴리니 O.C.S.O. 신모로, 그녀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아빠스]] [[폴 쿠투리에]]의 노력의 성과로 형성된 [[에큐메니즘]]에 열성을 쏟았고, 그 분위기가 수도원 전반에 흘렀다<ref name=weddell/>, 이 목적에 헌신해, 그녀는 자신을 1938년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에 [[기독교회]]의 [[일치]]를 위한 영적 제물로 바쳤다. 그 헌신 이후 그녀는 폐렴을 동반한 병에 빠졌으며, 15개월동안 앓은 결과, 1939년 4월 23일 하나님 품에 안겼다. 참고로, 그 주의 주일 [[성서공과]]의 [[복음]]에는 [[요한복음 10장#16절|요한복음 10장 16절]]이 포함되어 있었다. | ||
== 영성 == | == 영성 == |